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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없는 세계. 그곳은 그렇게 불렸다. 사실 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다. 아무것도 없다가 정확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 명칭이 익숙해졌기에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호화로운 저택 하나가 우뚝 서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어울리지 않게 처참한 듯한 한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그 한숨의 주인공은 그곳의 주인인 작은 소녀 - 정확히는 소녀의 형태를 한 인형 - 이었다.
소녀는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유는 한참 전에 자신의 수용치를 넘어버린 헤럴드들 때문이었다. 일단 자신에게는 헤럴드라고 불리는 이들의 기억을 찾아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손이 많이 가고 어려운 일이었고, 때문에 굉장히 제한된 숫자에게만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헤럴드들은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 기억을 다 찾은 헤럴드가 이곳을 떠나는 숫자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아지니,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신경 쓸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던 것이다. 게다가 성녀님은 무슨 생각인지 계속해서 새로운 해럴드들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시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과로사 시키려고 작정하신 건지...
그런 이유로 새로 온 해럴드가 올 때마다 했었던 환영식도 그만둔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헤럴드는 계속해서 늘어났기에, 소녀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파업이었다. 방문을 잠그고 이불 속에 틀어박혀선 한 발짝도 나오질 않기 시작했다. 굉장히 쓸모없어 보일 정도로 쉬는 것이, 소녀에겐 상당히 신선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 삼일... 계속해서 소녀가 파업을 하며 자신의 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자, 저택의 업무는 그대로 마비되었다. 그 일로 소녀, 지시자라고 불리는 소녀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는 게 역으로 증명되었고, 소녀의 시종들은 소녀의 방을 찾아가 가지고 있던 스페어 키로 방문을 열곤 들어가서 침대 주변에 둥그렇게 모였다. 그러고선 자기네들끼리 하나둘셋 구호를 속삭이며 신호를 보내더니 일제히 소녀에게 독촉하기 시작했다.
지시자 님으로 시작되는 그 외침은 굉장히 시끄러웠고, 소녀는 필사적으로 그 잔소리를 무시하며 이불을 꼭 붙잡고 안에 숨어선 휴식을 외쳐댔다. 그 목소리는 눈물마저 감돌았기에, 참으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으나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종들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종들도 한참 동안 필사적으로 소녀를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자 할 수 없이 내일은 꼭 나오시라고 당부하며 그대로 돌아갔다. 그날은 또 한 명의 새로운 헤럴드가 이곳에 왔던 날이었다.
할 수 없이 혼자 다크룸에 도착한 브라우는 새로 온 헤럴드를 맞으며, 당신을 이끌어줄 분이 파업한답시고 오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소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사정이 있어 자신만이 나온 점을 용서해달라고 청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 남자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럴 수도 있는 건데 괜찮다고 대답했다.
브라우는 그를 저택의 로비로 안내하며, 지시자 대신 그에게 이곳이 어디고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며 그 일을 하는데 지시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차를 마시면서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설명에 그는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끝내자 그를 데리고 새로 생긴 그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고선 방에 도착한 그에게 조만간 지시자가 찾아갈 거라고, 일단은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라고 말하며 그 문을 닫았다.
그는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일단 침대에 철퍼덕 앉았다. 눈을 감기 전하곤 완전히 달라진 장소, 그리고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꿈같아서 그는 사실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눈을 뜨면 평소처럼 돌아가 있을까? 하지만 평소에는 뭘 했었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치 통째로 파여버린 것 같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그런 느낌. 완전히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자신의 이름과 출신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은 세르바스. 그리고 인페로다의 군인. 그는 아까 받은 레이피어를 들고 한번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분명 익숙한 동작일 텐데, 휘두르는 느낌은 어딘가 어색했다. 힘과 기억을 되찾으라고 한 의미가 이것이었나. 기억을 잃으면서 무력도 같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이전엔 훨씬 능숙하게 다뤘었는데, 그 방법들이 떠오르질 않았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상황에 암담해진 그는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만약 다음에 눈을 떠서도 여기라면, 그 지시자라는 자를 찾아보기로 생각하며.
아침이 되자, 그는 다급하게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상황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잠시 후, 눈 감기 전의 그곳임을 깨달은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마를 짚고 앓는 소리를 내는 건 덤이었다. 아무래도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혹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던가... 어느 쪽이든 그는 선택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나은 가능성을 선택하기 위해선, 일단 어제 생각해뒀던 일을 해야겠지. 마음을 굳힌 그는 차분하게 옷을 갈아입은 후, 혹시 몰라 자신의 레이피어까지 챙겨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방을 나섰다. 아니, 정확히는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넘어졌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질끈 묶은, 밀크 초콜릿 빛이 감도는 회색 머리와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박이며 새하얀 망토를 꼭 붙잡고 바둥거리는 소녀를 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찾던 자가 이 소녀임을 깨달았다. 누군가 따로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머릿속에 팟 떠오른 그런 느낌은 처음 겪어서, 그는 잠시 동안 눈앞의 소녀를 잊고선 놀라고 있었다. 그 사이 소녀가 혼자서 벌떡 일어서서는, 자신이 당신의 지시자라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못 와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덧붙여서.
그는 옅게 미소를 짓고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대답하는 동시에, 이렇게 작은 소녀가 자신을 이끄는 자라니 믿어도 되는 걸까,라는 의심을 마음 한구석에서 떠올렸다. 어차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믿음직해 보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미뤄뒀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무작정 그를 이끌고 로비로 향했다. 우선은 그를 알아봐야 했기에, 그를 소파에 앉혀놓은 뒤 그의 신상정보가 쓰인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는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 언제 인사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며 소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서류를 보는 소녀의 표정이 점점 난처하다는 듯이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보다 못한 그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소녀가 먼저 그를 바라보고선 떨려오는 목소리 그대로 입을 열었다. "... 주거리가 근거리... 신가요? 어, 어쩌지?" 왜 그러냐고 묻는 그에게, 다소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저, 전 중원거리 전문이라서... 어떻게 해야..." 그는 대략 5초 동안 멍 때렸고,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앞날이 암담하다. 이 생각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소녀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렇지만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라고 덧붙였지만 이미 기대는 저택 밖으로 던져버린 상태였다. 이래서는 돌아갈 수 있을까? 암담함에 눈빛이 자연스럽게 흐려졌다. 한편 소녀는 한참 동안 종이에 뭔가를 휘갈기며 고민하다가, 갑자기 사전 설명 하나 없이 그대로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다. 놀란 그는 지시자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섰다.
밖은 음습했고, 지금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처럼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밖은 처음 나와봤기에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주변을 경계하며 소녀의 뒤를 따랐다. 소녀는 자신이 오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는지 고개를 한차례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치 짠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인형의 뒤에서 박쥐가 튀어나왔다. 그가 놀라서 다가가려는 순간, 인형은 생각 외로 잽싸게 움직이며 자신의 뒤로 왔다. 그러고선 그에게 공격을 지시했다. 그것은 되게 뭐랄까, 마법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묘한 경험이었다. 소녀가 말하는 기술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의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그에 따라 움직이며 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잊혔던 기술이 그의 머릿속에서 팟하고 떠올랐다. 이제 몇 가지 기술은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박쥐를 잡고 안심하며 추가 설명을 해주려던 소녀의 등 뒤로 불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녀는 순간 당황해, 눈만 깜박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가 침착하게 아까 했던 대로 몸을 움직이며 요마에게서 소녀를 구해내었다. 소녀는 그의 공격을 받고 사라지는 요마만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손을 내밀었고, 소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소녀는 그가 여전히 어색했는지, 아니면 멋쩍었는지, 뺨만 연신 긁으며 중얼거리는 듯한 투로 입을 열었다. "고, 고맙습니다. 음... 무작정 끌고 나왔는데, 뭐라고 하지 않으시나요?" 그는 나직이 대답했다. "그게 당신의 방식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녀는 원래 이렇게 깨닫게 해주는 게 일상이었다고 말하며, 그렇지만 역시 방식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만 깜박이다가 이내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괜찮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그걸로 만족하죠."
그는 소녀를 인정하기로 했다. 소녀랑 함께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다는 영문 모를 자신감, 혹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간에 소녀와 함께 헤쳐나가기로 - 그렇게 결심했다. 그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인사했다. "그럼, 아까 못한 인사를 하지요. 제 이름은 세르바스입니다. 아가씨,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시길." 소녀는 알았다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하다가 이내 말을 멈췄다. "아, 아, 아가씨라고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이제까지의 딱딱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러움이 묻어있어, 그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가씨니까 아가씨라고 부를 뿐입니다만? 뭔가 잘못되신 거라도?" 소녀는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앞으로 아가씨라고 부르는 헤럴드가 또 늘어났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약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별난 분이 오셨군요. 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세르바스." 소녀는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맞잡으며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
이것이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이후 이들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가 나아갈 테니까 말이다. 인형의 일기장엔, 오늘 이야기가 쓰이며 끝엔 작게 웃는 그림이 그려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