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여자는 침착하게... 아니,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그렇지만 조금의 당황스러웠는지 살짝 떨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린 시절 동심이 잔뜩 피어오르게 만드는 아기자기한 주변 장식과 건물과, 목소리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 마지막으로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ㅇㅇ랜드~!' 라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이곳은 분명...
"놀이공원, 이란 곳이었나."
그 말에 남자, 아이릭은 기쁘다는 듯이 박수를 짝짝 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어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데려온 것 같은 뿌듯함을 담아서.
"정답이에요. 이디스. 그렇게 당황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네요? 데려온 보람이 있을지도?"
"뭐? 대체 무슨..."
"궁금해요, 이디스? 궁금하면..."
아이릭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이디스라 불린 여자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리며 굉장히 따가운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그 눈빛은 익숙하지만 그래도 이유를 모르겠기에 그만 멍해져버렸다. 그런 그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듯 이디스는 그대로 분노를 꾹꾹 눌러 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마지막에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날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납득시키지 않는다면 오늘 강연 일정을 펑크 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아카시아."
"네? 오늘 아무 일정도 없는 거 아니었어요?"
"어젯밤 늦게 잡혔었다만."
"그런 걸 덜컥 받으면 안되죠! 이디스, 요즘 너무 무리하셨다고요!"
"그래서 여기로 온 건가?"
"그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릭은 이 상황을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졌다.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졸지에 멱살이 잡혀버려선, 허리가 접힐 것 같은 공포를 피부로 느끼며 그는 이디스의 분노를 잠재울 필요성을 다급하고도 절실히 느꼈다. 변명이나 애교는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였으니, 그냥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제일 나아 보였고, 여러모로 그것이 제일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사실 이 말도 안 되는 납치극(?)은 며칠 전부터 줄곧 구상해왔었다고 운을 떼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디, 에디? 오늘 밤은 어때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무리겠군. 하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그거 2주째..."
쾅.
잠자리를 거부당한지 2주가 되어가는 날이었다. 아이릭의 잠자리 제안을 또 다시 거절한 이디스는 매몰차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루 이틀이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넘어간 건 처음이라 아이릭은 슬슬 어떠한 조치라도 취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디스는 지치면 항상 자신을 찾아와 몸을 섞는 걸로 해결하곤 했는데 그것조차 거부를 한다는 건 그것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지쳐버린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방금 전의 이디스의 눈은 생기를 잃어 꼭 죽은 생선 눈알을 보는 것 같았고, 들어가던 모습은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초췌해 보였었다. 워낙 이디스가 자기 관리가 철저히 하는 편이라 힘들어하는 내색은 거의 내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였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이디스는 무리하고 있었다. 그 치료소에서 잃어버리고 놓았었던 시간들, 부서졌던 신념을 만회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금 손 안에 남아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서였는지 그 이유를 자신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남들이 보면 굉장히 필사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고, 그만큼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빛났지만, 그것은 마치 초신성의 빛과 같아 최후의 발버둥으로 반짝거리다 최후에는 폭발하거나 부서저 내리는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들어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이대로 그를 계속 놔둘 순 없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 끝에 든 결론은, '그에겐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였다.
결론을 내긴 했지만, 막상 이디스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해야 할지는 퍼뜩 떠오르질 않았다. 조금 고민해보던 아이릭은 결국 이 집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상의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디스의 흘러가듯이 했던 말로는 그 자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다고 했었으니, 자신보단 더 괜찮은 방법을 제시해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그러고서 아까까지의 일을 말해주며, 이런 이유로 그가 좋아 할 만한 걸 알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감동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었다. 본인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연극을 좋아했었고,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하는 것도 좋아해서 대학교 다닐 때는 연극 동아리를 가고 싶어 했는데, 어째서인지 돌연 그걸 포기하고 그냥 공부만 하면서 다녔다고. 주인님과 마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취미 생활 같은 사소한 것까지 포기하진 않았을까 하며 슬퍼하는 아주머니를 달래며 그는 슬며시 자리를 벗어났다. 연극을 좋아한다니, 상상도 못한 취향인데. 하지만 남의 취향을 멋대로 판단하는 무례함 같은 건 갖추고 있기 않았기에, 아이릭은 생각을 다음 차례로 넘겼다. 연극을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한다니, 그렇다면 연극을 보러 가는 게 맞는 걸까? 그렇지만 어느 연극을 좋아하는지까진 그도, 그 아주머니도 알 수 없었기에 그것은 무리였다. 남은 건 하나. 차라리 연극 의상을 입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 뿐. 그는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근처 놀이공원 안에 크게 마련 되어있는 코스프레 가게를 떠올렸다. 그렇게...
"그게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인가."
이디스가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릭의 멱살을 붙잡은 손에서 힘을 빼고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또 맞을까 불안해했지만, 의외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의 이디스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혼자 그는 반성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남들에게 걱정이라던가, 신경 쓰이게 하지 않는 게 당연한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디스에게 지금의 상황은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결론이 나왔기에, 이디스는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이디스는 주먹대신 앞장서라고 말하면서 입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말에 그가 빙긋 웃으며 이디스를 이끌었다.
이디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있다만, 사실 아이릭이 굳이 놀이공원으로 온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릭이 미리 알아둔 건 사람들의 눈물콧물을 쏙 빼놓는다는 엄청난 놀이기구들. 그걸 탄 이디스가 당황한 일색으로 비명을 지르며 울고불고 하는 모습을 조금... 실은 많이 보고 싶은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순진한 이디스, 두고두고 놀릴 거리가 생길 것도 모르고 저를 앞장 세우시네요! 그걸 생각하는 그의 얼굴에서 불길한 미소가 점점 더 크게 걸려 입이 귀에 걸릴 동안, 이디스 본인은 별 생각 없이 주변을 열심히 관찰하고 구경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
처음으로 바이킹을 탄 이디스의 소감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온갖 비명을 지르며 각자의 소중한 사람을 찾을 동안,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찬찬히 관찰하며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문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타고나와 땅을 밟은 순간 내뱉은 소감이 더 가관이었다.
"원래 놀이기구라는 게 이렇게 시끄러운 거였나?"
"보통은 비명을 지른다고요, 이디스. 와본 적 없어요?"
"그런가. 확실히 예전에 왔을 때는 소리를 질렀던 거 같기도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군."
"그 예전이 언젠데요?"
"3살? 4살?쯤인가. 이런 비슷한 광경을 본 기억은 대충 그때쯤인 거 같다만."
"... 거의 제가 막 태어났을 때잖아요? 그럼 그 이후에는요?"
"7,8살인가. 학교를 들어가서부터는 기억이 없구나."
아이릭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왜 그러냐고 순수하게 묻는 이디스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솟아났지만 애써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 이후로도 그는 어떻게든 이디스의 평정심을 깨뜨리기 위해 온갖 놀이기구... 그러니까 롤러코스터라던가 자이로드롭 등의 갖가지 무섭다는 놀이기구들로 끌고다녔지만, 결국 이디스의 평정심을 깨뜨리는 건 실패로 끝났다. 심지어 유령의 집을 갔을 때는 눈 앞에 나타나는 유령과 괴물들의 분장을 꼼꼼히 관찰하며 그 세밀함에 감탄을 하고 있어서 보는 자신이 더 부끄러웠었던 건 덤이었다. 결국 이디스를 놀리는 건 실패하고, 그는 조금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그냥 원래 목적대로 코스프레 가게나 가자고 말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오... 저거, 저거 타보고 싶구나. 아이야!"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며 이디스가 가리킨 곳은 딱 봐도 동심이라 쓰고 유치함이 가득 넘쳐 보이고, 엄청나게 지루하며 재미없어 보이는 그 꼬꼬마들을 위한 놀이기구였다. '요정의 세계로'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그 놀이기구를 본 아이릭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이디스를 바라보았지만, 그가 너무나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보며 가능하겠지?라고 물어보는 바람에 아이릭은 애써 가자고 대답하면서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하릴없이 끌려갔다.
"우리 요정나라를 구하러 와줬구나!"
"우와, 엄청 오글거려요. 이디스. ... 이디스?"
"안심하거라, 아가야. 너희를 구해주겠다!"
"이디... 스..."
그런 놀이기구들이 다 그렇듯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놀이기구가 가진 이야기의 결말은 누군가를 사지 멀쩡하게 구출하고, 일을 벌인 괴물이나 마왕 빼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릭에겐 지옥과도 같은 그 놀이기구를 나오면서, 그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이릭에게 말했다.
"내가 그들을 구했다고 하는구나!"
"원래 거긴 그런 곳이에요, 이디스."
"노력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이야기라니, 동화라는 건 참 좋지 않으냐?"
"... 그러네요."
그가 가진 상처가 떠올라 조금 애잔해졌는지, 아이릭은 더 이상 태클을 걸지 않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그래도 그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데려온 보람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아이릭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졌다. 아이릭이 내민 손을, 그가 덤덤해 보이지만 살짝 기뻐하는 눈초리로 붙잡으며 그 기분 그대로 그대로 둘은 목적지로 향했다.
"정말, 정말로 되는 건가?!"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잖아요, 이디..."
"고맙다."
"물론 그러셔야... 네?"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이디스의 반응에 아이릭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그를 바라보며, 아이릭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이디스 앤시어라는 사람은 자신에겐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뭐, 과거에는 그가 자신을 싫어하다 못해 미워했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하긴 했지만, 그렇게 틀어지기 전에도 그런 모습을 본 기억은 거의 떠오르질 않았기에 섭섭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 오랜만에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게 되어 신나있던 상태라, 아이릭이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상태였는지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 했다. 그저 사양하지 않고 입어보겠다고 말하며 잽싸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세요, 그러라고 데려온 거니까요.라고 힘없이 대답하며 아이릭은 손을 흔들어줬다. 어차피 이디스는 들어가 버려서 보이지도 않을 테니, 아이릭은 옆에 있던 벤치로 가서 손목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그가 무심했던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고, 지금의 상황은 그때에 비하면 굉장히 좋아진 것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간 것 정도? 사실 평생 동안 원하지 않았어도 등 돌리며 살아야 하는 건지, 더 이상은 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는 건지 낙담하던 찰나에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줬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왜...?
시간이 한참 동안 흘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미동도 없는 문을 보며 아까의 혼란스러움은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고, 도대체 옷을 만들어서 입는 건지 모를 정도로 부질없는 기다림만 이으며 설마 어디로 가버렸나?!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 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 기다렸냐는 말하는 호탕한 외침이 들려왔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핀잔을 주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순간, 아이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떠선 그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가슴이 거의 보이지 않게 압박시킨 후 심플하지만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망토와 중세 유럽풍 옷을 걸친 그는, 마치 무대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처럼 완성도가 높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상상 이상으로 재능도 있던 걸까? 그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그는 갑자기 아이릭을 향해 다가가선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아이릭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선 천천히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 별이 불이 아닐까 의심하고, 태양이 돌지를 의심하며, 진리조차 거짓이 아닐까 의심할지라도 나의 사랑만은 의심하지 말아주오."
"그, 그게 무슨..."
느긋하면서도 힘 있는, 호소력 넘치는 대사에 그는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침착하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으려 했지만, 이미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 나와 무리였다. 이 대사, 자신에게 하는 것일까? 설마 고백? 하지만 이디스는 여전히 무심한데다 마이웨이였던지라, 그의 반응이 어떤 것이 나오든 개의치 않고 (사실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대사를 이어갔다.
"아,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는 운율에 서툰 사람이라 이 마음을 옥죄는 사랑의 고민을 시로 읊어낼 수는 없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가장 많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사랑하고 있소. 이것만은 믿어주시오."
"이, 이디스..."
그 이후로도, 이디스는 여러 옷을 입고 나와 그 의상에 어울리는 캐릭터에 이입을 하며 대사를 외치곤 했다. 결국, 그가 속삭이는 건 단순히 다른 인물이나 말할 법한 대사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는 그제야 끝내고 나와선, 즐거웠다고 말하며 악의 없는 해맑은 미소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말로 무심한 사람, 그럼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아이릭은 약간 퉁명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좋아한다곤 들었지만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요. 이디스, 사실 연구하는 것도 연극의 일부라던가... 그런 건 아니죠?"
"그건 별개다만. 하지만 연구자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이쪽으로 갔을지도 모르겠군."
"그게 즐거운 건가요?"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내가 겪어보지 못하는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하게 되니까 말이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하고 같은 거란다. 다만, 이건 책을 읽는 쪽보다 훨씬 분명한 경험을 해보게 되니까 좋아하는 것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버려, 해가 대지 밑으로 내려앉고 그 자리를 어둠이 대신하며 온 땅을 뒤덮는 시간이 되었다. 그것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화려하게 수놓아진 불빛. 대지를 감싼 어둠의 틈새에서 화려한 빛이 일렁이며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고, 그 빛을 싣고 기나긴 행렬이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런 광경을 처음 보았던 이디스는, 어느새 덤덤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반짝임을 몰래 품어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하나하나 담으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놀이공원은 낮보다 밤이 더 예쁘니까 그 반응까지는 예상했었기에, 아이릭은 신기해하는 그의 모습을 빙긋 웃으며 살펴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조금이라도 눈 안에, 머릿속에 넣어놔야지. 한편, 그는 그 광경에 매료되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아이릭에게로 고개를 돌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이릭은 그런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여, 어느새 아까의 서운함은 온대 간 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당신이 좋아한다면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곧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될 테니 그거까지만 보고 가자고 말했다. 자신은 불꽃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말에 그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좋아한단다."
"네?"
"불꽃놀이 말이다."
"아..."
그럼 그렇지. 아이릭은 조금 실망한 내색을 띠었지만 이내 그게 이디스라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실망하는 아이릭의 귓가로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란다, 아이야."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이디스를 바라보려던 찰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이 아이릭의 입술은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에 막혀버렸다. 이 감촉이 무엇인지 알고 있던 아이릭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으나, 그 사고마저 마비시키는, 다정하지만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감각이 입안을 휘저어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혀 끝부터 밀려오는 간지러움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 좋음이 머릿속을 후려쳐서, 어느새 그의 숨은 거칠어져 달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달뜬 숨을 토해내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그 와중에 이디스는 차분히 한 손으론 그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으론 그의 등으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등을 지긋이 눌러 조금 더 가깝게 밀착시켰다. 그러고선 가볍게 그의 몸을 쓸어내리며, 이제까지 보지 못 했던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냈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데, 너는 되었니, 아이야?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상냥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띄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것이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꿈이라면 깨지 말아주기를.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이어지는, 뜨겁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일련의 애정이 듬뿍 담긴 행동에 아이릭은 그대로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