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선택해라.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죽을 것인가, 뒤틀림을 거부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은 끝을 향해가는 어느 이야기. 몽롱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보이는 주변 풍경은 촛불에 초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일렁이며 여자를 한층 더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어그러짐 속에서 딱 하나 분명한 존재가 자신을 향해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끝나기 싫다. 이 납득할 수 없는 결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것이 올바른 운명이 아니라, 무언가로 인해 부정당한 것이라면... 그 미래를 되찾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찾을 거... 야!"
손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붙잡을 것이다. 그토록 찬란하던 인생을. 설사 그것이 저 재수 없는 여자를 따르게 되는 일이라고 해도.
푸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신형이 힘없이 쓰러졌다. 여자는 피를 흘리며 미동도 없이 차가운 땅바닥에 그대로 덩그러니 고정되어있었다. 괴물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방심하며 등을 돌려 발걸음을 떼는 사이, 그 곳에 온몸이 하얀색 일색인 신비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어딘가 성스럽기까지 보이는 하얀 여자가 차갑고 딱딱한 죽음에 입을 맞추듯이 쓰러져있던 여자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놀랍게도 이미 죽은 것 처럼 보였던 여자가 실이 연결된 인형같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며 일어서는 그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못해 너무나도 기괴했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을 주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를 죽였던 괴물은 거대한 식칼... 아니, 식칼처럼 보이는 도끼에 두 동강이 난 후, 하얀 여자가 만들어낸 흰 구슬 속으로 흡수되어갔다.
"거슬리는 건 모조리 베어주겠어..."
어딘가 공포마저 감도는 무서운 말에도 하얀 여자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날 이후 그녀, 실러리는 저 도도하게 지팡이를 치켜들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 노이크롬의 밑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어그러진 인과로 인해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를 구하는 일이라면서, 수많은 존재들을 베게 만들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오랜 시간에 걸쳐 여자의 옆에서 지내며 얻었던 결과는 '노이크롬은 보통의 인간의 범주 따윈 이미 뛰어넘은지 오래인, 매우 독특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분하긴 했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다. 한 번도 죽어본 적이 없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동안 이 여자, 노이크롬이라 불리는 눈앞에 있는 존재의 뜻에 따라 수많은 존재들을 베어나가며 인과를 바로잡기 위해 애를 썼다. 여자가 보여줬던, 아름다웠던 꿈을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밑바닥에 있던 친구까지 데려와서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그 꿈. 자신의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맛있다고 해주는 그 환상이 서글프게 빛났었지. 여자의 말로는 그것이 자신이 원래 가져야 할 미래라고 했었다. 그러니까 그 미래, 그 행복을 붙잡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그녀의 명에 따라왔었다. 하지만...
"모르겠어. 벌써 수없이 많은 세계의 인과를 바로잡으며 무던히 애를 썼지만... 내가 있던 세계는, 친구들은 언제쯤에야 구원받을 수 있는 거지? 대답해."
오랜 시간을 따라왔다. 그러기에 알 수 있었다. 여자는 '혼자만' 완벽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개입할 수 있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자신, 그리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 그것은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분명 그녀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여러 세계는 변화했고, 행복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도 생겨났다.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을 한다면 아마...
"... 나를 의심하는 건가."
여자는 다리를 꼬고 깍지를 낀 후, 턱을 괴며 도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한 저 눈빛을, 그녀는 언제나 참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유감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래. 우리가 있던 세계는 언제쯤에야... 개입할 생각이지?"
"... 지금으로썬 알 수 없다."
"너...!"
여자는 또다시 그녀에게 멱살이 잡혔다. 이거 이거, 처음 보았을 때랑 똑같은 전개인가.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처음 여자의 눈빛이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아무런 감정 없는 담담함만을 담아냈었다면, 지금 여자의 눈빛은 어딘가 아득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미세한 차이를 그녀는 아마 알 수 없겠지. 여자의 입이 열렸다.
"뒤틀려 있는 세계는 넘쳐나고, 지금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다른 뒤틀림 들을 해결할 때까진, 너희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기억하지 않나. 뒤틀린 세계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너와 같은 결말을 향해 가게 된다는 것을."
"..."
순간, 동요한 건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여자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담담하게 멱살을 풀어내며 몸을 돌려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말이 이어졌다.
"... 너희에겐 감사하고 있다. 세계를 구한다고 해도, 너희에겐 자신의 세계가 아닌 이상 그렇게 중요하게 와닿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너희는 나를 따라주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등은 평소와 달리 어딘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작아 보였다. 왜였을까? 그 순간, 맨 처음으로 여자를 따르게 되었고, 여자의 페어이자 파트너였던 그녀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혼자만 완벽해서, 그 누구보다 깊은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사명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고, 그러기에 자신과 같은 존재들을 모아 노력해오는 동안... 실은 그 누구보다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끝없는 싸움 속에서, 과연 자신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우리에게 했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세계 같은 거창한 걸 지킬 수 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여자는 절박한 만큼 철저하게 그 조급함을 감추며, 도도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섰던 것이다. 그렇지만 왜? 어째서 이런 걸 알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자의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약속 할 수 있다. 내가 사라지기 전까진, 반드시 너희에겐 인과를 올바르게 되돌리는데서 오는 더없는 행복을 줄 것이라고. 카르두우스를 만들 때부터, 이것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건 믿어주길 바라는군."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너는..."
상관없잖아.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고, 남의 일일 텐데. 그냥 외면해버리면 끝날 일이잖아. 하지만 여자의 대답은 단호했다.
"새삼스러운 걸 물어보는군. 세계를 바로잡는 것이 나의 사명. 거기에 다른 명분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그게 당신이었지. 자신에 대한 건 생각할 시간도 없는 다중 세계의 단죄자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나는 먼저 가볼 테니 끝나면 오도록."
여자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분명 다른 카르두우스 녀석들을 확인하러 가보는 것이겠지. 그녀는 근처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자신의 무기를 손보면서 중얼거렸다.
"... 바보 같은 여자."
스스로를 생각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세계를 사랑하는 그 바보 같은 여자는, 지금까지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위해 뛰었을 것이다. 그녀는 장갑을 고쳐 끼며 친구들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시만... 너희보다 더 외로웠을 그 여자를... 도와야 할 거 같으니까.
그녀는 달려나갔다. 여자가 있을 곳으로, 여자의 곁으로.